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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리의 역사

by Pone_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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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는 그 지방의 자연환경과 오랜 문화와 역사를 기초로 하여 그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형적 여건은 그 나라의 식생활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서양 요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식문화, 국민성, 자연환경과 지형학적 위치를 잘 살펴보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본 글을 시작으로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네 나라 요리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국

 

1. 자연적 환경

 

  우리나라는 북위 33~43°에 남북으로 950㎞에 걸쳐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22만 ㎞²이고, 농경지와 산이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국이다.

온대기후에 속하고 사계절의 구분이 확실하며 기온, 습도, 강우량이 농사와 축산에 적합하다. 여름철의 고온과 장마, 남북의 기온 차이, 일조 시간이 많고 건조한 계절은 밭작물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2. 사회적 환경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4,800만 명(2003년 통계)이며, 대륙과 해양에서 문화를 qkekdmef이고 전해줄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어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식생활 문화는 13세기 이전까지 북쪽의 국가, 16세기 임진왜란을 계기로 남쪽의 국가, 19세기에는 서양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와 발달을 이뤄왔다. 곡물 농사에 적합한 기후와 풍토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생활을 하였던 삼국시대 후기부터 밥을 주식으로 반찬을 먹는 식생활 형태가 형성되었고, 채소를 소금에 절여먹는 김치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숭배하는 정책으로 인해, 식생활에서 육식은 쇠퇴하고 채소음식과 차(茶)가 발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북쪽의 여러 국가(송, 여진, 몽고)와의 교역이 활발하였으며 소금, 후추, 설탕 등이 들어왔고, 우리의 상추쌈과 약과는 중국 원나라에 전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효(孝)를 근본으로 조상을 섬기고 가부장제도에 따른 식생활을 중요시하였다. 이 시대에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옥수수, 땅콩, 호박, 토마토, 고구마, 감자, 고추 등이 유입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한국의 전통 식생활이 체계가 잡혔다.

3. 음식문화의 특성

 

  한국은 정성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 땜누에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중요시한다. 주식인 밥과 찬물을 부식으로 같이 먹는 gudx로 발달하여 식품 배합이 합리적이며 음식의 영양, 색상, 간의 농담, 온도의 조화를 추구한다. 주식은 쌀이나 보리 등 다양한 곡물류를 찬물로는 채소, 육류, 어류 등의 재료를 이용하며 계절에 맞추어 김장, 장, 젓갈 담기, 채소 말리기 등 저장발효식품과 건조저장식품을 만들어 기본 찬이나 양념으로 이용한다.

 

⑴ 곡물 음식의 다양한 이용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 잡곡농사로 시작하여 기원전 2,000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된 이래 쌀이나 보리 및 잡곡 등 곡물로 만든 밥을 주식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죽, 국수, 떡과 같은 곡물 음식을 흔하게 이용하였으며 곡물을 가공하여 만드는 엿, 술, 장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한국인에게 있어 곡물 음식 밥은 식문화의 중심이 되어 농경사회가 본격화된 시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죽은 최초의 곡물 음식으로 밥이나 떡보다도 먼저 이용된 것으로 보이며 밥이 일상적인 주식으로 정착되면서 죽은 보양식, 기호식, 구황식으로 다양하게 발전되었고 떡은 주로 의례음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일상식의 큰 특징으로 주식과 부식의 구분이 뚜렷함을 들 수 있는데 벼농사를 짓게 되면서 곡류가 주식의 위치에 어육류, 채소류가 부식으로 자리 잡게 되고 밥 짓기가 일반화된 삼국시대 후기부터 일상식으로 주, 부식이 구분되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⑵ 발효식품의 발달

 

  한국음식에는 긴 역사를 가진 장류, 침채류, 젓갈류 등 여러 발효음식이 많이 있다. 이들 음식은 각기 독특한 맛과 기능을 가지고 한국음식 문화의 기조음식이 되어 부식, 혹은 양념으로 이용되고 있다. 콩으로 만든 장류는 양질의 동물성 단백질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여건에서 중요한 단백질 급원으로 균형 잡힌 영양섭취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에 간을 맞추고 조화된 맛을 내는 조미료로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일상식의 기반이 되는 식품이다. 김치는 신선한 채소를 얻을 수 없는 겨울철에 대비하여 개발된 독특한 저장식품으로서 밥과 같은 곡류 음식과 좋은 조화를 이루며 밥의 찬이 된다. 요즘에는 김치의 다양한 건강기능성이 밝혀져 외국에서도 우수한 식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선이나 그의 내장 및 조개 등에 소금을 넣어 일정기간 동안 발효시킨 젓갈은 단백질이 풍부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한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에게 아미노산의 공급원으로 이용되고 김치 담글 때 주요 양념으로 이용된다. 이들 발효식품은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자랑할만한 전통식품이라 할 수 있다.

 

⑶ 다양한 식물성 식재료 이용

 

  우리 음식의 재료를 살펴보면 채소, 버섯, 종실류, 해조류 등 다양한 식물성 재료가 풍부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상용하는 채소는 재배 채소를 포함하여 산나물, 들나물 등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밥, 죽, 떡, 국, 찌개, 나물, 쌈, 찜, 생채, 전 등 거의 모든 음식의 조리에 채소가 사용되고 있다. 산이나 들에서 나는 나물들에는 비타민, 무기질뿐만 아니라 섬유질과 항산화 작용을 지닌 성분들이 풍부하다. 채소류의 전통적인 조리방법은 번거롭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지만 채소는 주식에 곁들여 먹는 부식으로서 오늘날에도 우리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대를 거쳐오면서 전통적으로 이용된 채소에 더해 새로운 채소들이 유입, 재배되고 조리법도 개발되어 다양하게 이용함으로써 무기질과 비타민의 공급뿐만 아니라 독특한 텍스쳐와 색 및 향미로 음식의 3차적인 기능성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⑷ 국물음식문화 발달

 

  한국음식은 국물음식이 많은 탕반 문화가 발달하여 일상적인 반상차림에 국이 꼭 올라오며 찌개, 전골 등의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따라서 음식을 입까지 나르는 도구로 숟가락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유럽을 포함하여 동남아시아, 아랍, 아프리카 등 전 세계적으로 전통적인 식사도구는 손가락이었다. 물기가 없거나 적은 음식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지만 찌개나 국을 손으로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흔치 않게 숟가락이 이용된 것이다. 물기가 많은 음식은 식기류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쳐 우묵한 입체성의 용기를 주로 사용하게 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한 그릇에 여러 음식을 잠아 먹는 일기다식(一器多食) 문화가 대부분인데 비해 한 그릇에 한 음식만 담아 먹는 일기일식(一器一食)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⑸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사상

 

  한국음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예로부터 약식동원의 조리법이 발달했고 ‘밥보다 좋은 약은 없다’는 식생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먹는 것이 바르지 못하면 병이 생기고 병이 생겨도 식을 바르게 하면 병이 낫는다는 의식이다. 식생활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보양식이나 양생 음식이 발달하였고 상용하는 술과 음청류에 한약재를 첨가하는 조리가공법이 보급되어 병의 예방과 체료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음식에 약리 활성이 있는 꿀, 계피, 잣, 인삼, 생강, 대추, 오미자, 구가지 등의 한약재를 함께 사용하기도 하며 약과(藥果), 약식(藥食), 약주(藥酒)와 같이 음식 이름에 약(藥) 자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식생활의 중요성을 일직 간파하고 약식동원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⑹ 조반을 중히 여김

  아침식사를 가볍게 하는 서구의 음식문화와는 달리 한국인은 하루 세끼 중에서 아침식사를 가장 중요시했다. 농경생활을 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위해서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현대의 영양학적 측면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저녁식사와 다음날 아침식사까지의 거의 12시간 이상의 간격에서 아침식사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⑺ 복합적인 맛

  한국음식은 음식재료 자체의 맛보다 조미료와 향신료를 써서 복합적인 맛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단맛, 기름진 맛, 매운맛이 아닌 은은한 맛으로 혀끝이 아닌 입안 전체로 느껴지는 맛을 내는 음식이다. 간장, 파, 마늘, 깨소금, 참기름, 고춧가루, 후추가루 등을 갖은양념이라 하여 한 가지 음식에 적어도 5~6종류의 조미료를 복합하여 사용함으로써 이 같은 맛의 특징을 살리고 있다.

 

4. 우리나라의 서양요리 변천사

 

1) 도입기(1882~1910 년 까지)

  우리나라 서양요리의 발전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양식을 접하고 애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양식을 제일 먼저 맛본 사람은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후트 장군을 처음 고정에게 소개한 윤치호 선생이다. 1882년 5월 3일 강화에서 맺은 한 · 미수호통상을 그분이 후트 공사와 같이 진행 · 조인하고 난 다음 천막에서 축하 파티를 거행했다.

  그다음으로 고종 20년인 1883년 초대 주미전권대사인 민영익과 그의 수행원인 유길준일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 첫 발을 내디딘 주한미국공사에 대한 초빙 사절로 미국에 건너가는 도중 선편으로 40일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돌았는데, 후트 공사가 상해에서 타고 온 기선을 되돌려 타고 갔으니 아마 함상에서부터 서양요리를 맛보았거나 뉴욕에서 당시 미국 21대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찾아가서 고종의 국서를 봉정할 적에 ‘디너’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서양요리를 제대로 접하기 시작한 사람은 고종과 순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요리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생억지로 먹었으니 실로 딱한 노릇이었다. 고종 32년 8월 20일(음력) 새벽 경복궁에서 민비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고 은퇴했던 대원군이 다시 등장해 고종과 순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방에 몰아넣고 말았는데, 이때 제일 두려운 것이 음식이었다고 한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겠고, 먹자니 독약을 섞었을까 겁이 나서 차마 수저를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외국 사진 중 ‘러시아’ 공사 ‘웨벨’의 부인이 손수 조석 수라를 만들어 이 중 철궤 속에 넣고 자물쇠로 채워 궁중을 배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싫으나 좋으나 양식으로 이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보듯 고종은 그해 12월 21일 새벽 정동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 석 달 동안은 오로지 철궤 속에 잠겨져 들어오는 서양요리로만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머무르는 동안 양식 맛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덕수궁에 돌아온 뒤 예전과 정반대로 ‘러시아’ 공관에서 양식을 시켜다 먹고는 했다. 물론 궁궐에는 양식을 만드는 지기 등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즈음에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양식의 진미를 들여 준 사람은 손탁이란 여자였다. 그녀는 웨벨 공사의 처형을 h처음에는 양과자를 만들어 민비에게 선사하여 환심을 산 뒤 민비에게 서양요리 강습도 해 주고 손수 요리도 바쳤다.

  그 후 손탁 호텔은 이화학당에 매입되었고, 하남 호텔로 운영되다가 1995년에 철거하고 현재는 터만 남았다(정동 MBC 방송국 밑에 있음). 특히 손탁이 떠나던 해 경회루에서 열린 뷔페 형식의 개국 축하 파티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황제는 마침내 특명을 내려 궁궐에 본격적인 양식 도입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서양요리에 맛 들인 고종은 궁중의 양식을 맡을 식보관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국 유학생 윤기익을 앉히고 서양요리의 본고장인 파리에서 일류 Cook을 초빙하고 집기 일식을 사들이게 했다. 그리하여 런던대착 광산과 출신인 윤기익은 엉뚱하게 궁중의 양식 도입에 공헌하게 되었으며, 또한 궁중의 선무장 안순환도 양식기 도입에 큰 몫을 맡았다. 정식 무역 루트가 없었던 때라 처음으로 나간 해외공관장을 통해 집기와 요리책을 사들였는데, 매끈매끈한 포크와 나이프는 스웨덴과 스위스에서, 도자기류는 벨기에에서, 글라스는 얇고 단단하고 투명한 프랑스 제품을 조달해 모든 그릇에 대한제국의 배꽃 마크를 새겨 권위를 높였다.

  궁중의 다이닝 홀도 프랑스 사람 콜브라의 협력으로 상젤리제궁의 스타일 을 본떠 찬란하게 꾸몄으며, 냉장고는 없었지만 나무궤짝에 천을 깔고 얼음을 재어 원시적이나마 아이스 박스로 사용했다. 또 창고에는 외교 루트를 통해 각국에서 들어온 요리 감들이 군침을 돋궜는데, 창덕궁 연회장 창고에서 마저 ‘마드리드’ 제 딱지가 붙은 지중해 올리브가 오는 데 놀라움을 표할 정도였다.

  한일합방(1910)이 되기가 무섭게 일본은 프랑스여리에 탐닉해 있는 고종의 호감을 사려는 듯 일본 황궁의 요리사 요시무라를 고종에게 보냈다. 그는 14년 동안이나 파리에서 요리 솜씨를 익히고 3년간 일본 황실에서 일한 베테랑이었다. 요시무라 밑에 이태운 · 이기풍 등과 보조원 34 명, 웨이터 10 명 가 량이 배속되어 고종의 입맛을 다스리는 서양요리팀으로써 나무랄 데 없는 진용이었다. 이태운의 빵과 과자를 굽는 솜씨에 당할 자가 없었다(디저트 담당). 그리고 이기풍은 고기와 닭 · 생선 등 어 · 육류를 다루는 데 명수였다. 그는 도미를 저미는 데 비단을 재단하듯 예쁘게 칼질을 할 뿐 아니라, 몇 인분이냐 에 대탑만 떨어지면 머리와 꽁지만 떨어져 나가고 주문대로 정확한 양이 도마 위에 준비되었다. 생선을 프라이팬에 익혀 접시에 담고 맛있는 소스와 계절에 맞는 채소를 곁들이는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궁중에 교훈처럼 퍼져 있는 한 토막의 실화는 프랑스 루이 14 세의 요 리장이 식민지 각국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기로 국왕과 약속했는데, 재료가 시간을 맞춰 당도하지 않아 약속을 못 지킨 것을 뉘우쳐 주방장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은 이 같이 훌륭한 주방장과 웨이터를 두고 제맛 나는 본고장 양식을 즐겨 매주 금요일에는 신하들을 위해 양식을 준비했고, 매주 수요일에는 왕족들을 위해서 궁중에 있는 동행 각에서(현재 덕수궁 안에 가면 시청 쪽으로 정관헌이라는 사각형 연회장이 있는데, 동행각은 아마 없어진 것 같다) 이른바 만찬을 곧잘 베풀었다.

  윤치호는 1885 년 초대 주한공사 후트 장군과 상해 미션 스쿨 중서 학원을 마치고 본넬 교수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제1호 감리교인 세례를 받은 후 다시 미국에 건너가 내슈빌의 밴더 빌드 대학과 조지아의 메모리대학을 마쳤고,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따라 모스크바에 다녀오는 길에 일행과 떨어져 파리에 머물렀던 관계로 미국식과 프랑스식 요리에 흠빽 젖어 들어 귀국하자 약현(현 봉래 언덕 )에 대저택을 꾸미고 처음으로 양식(다이닝 룸) 집을 차렸다.

  더구나 선생 온·중국인 馬 노라 여사(미국 멕티어여대 졸업생 )와 국제결혼하여 그 당시 서양식(스토브)까지 장치하고 에그프라이며 토스트에 버터를 바른다, 오트밀을 끓인다는 등 장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외무대신을 지낸 이하영과 통역관으로 서울시장을 지낸 이채연도 자택에 서양요리 숙주를 불러다 놓고 무도회까지 벌였는데, 이들은 외국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서양요리를 대접했다. 알고 보면 이 같이 외국물에 젖은 사람들이 양식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또 외국어학교 교사들이 서양 요리 보급의 촉매 역할을 했는데, 피크닉 · 파티다 하여 영어선생이 앞치마를 두르고 수십 명의 학생들 앞에서 양식요리 강습을 벌이는 광경이란 영어강좌인지, 요리강좌인지 분간 못할 정도였다. 1896 년 7 월 2일 독립신문에는 외국어학교 학생들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초대하여 서양요리를 만들어 대접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선생 집에 자주 드나들며 양식을 즐기고 향수를 달랠 수 있었던 것은 도리아 펜 셀러나 언더우드 그리고 영 J. 앨런과 같은 옛 선교사들이었다. 그 대신 이들은 상해에서 버터 · 치즈며 드레싱까지 기선 편으로 실어 날라 양식의 경맥을 유지할 수 있는 조달원 구실을 맡기도 했던 것이다. 윤치호의 집에서 소문난 양식이 처음 대중에 흘러들어 간 것은 YMCA 그릴이었다. 당시 일본문화가 마구 쏟아져 나와 이른바 혼마찌라던 현 충무로 일대에는 첫 양식집 정목당(일인경영)을 비롯해 일본 책 가게며 다방 · 카페 등이 문을 열어 통경의 긴자 한 모퉁이를 옮겨다 놓은 양 ‘게다’ 짝 소리가 드높았다. 양식만 하더라도 일식인지 1 양식인지 분간 못할 어중간한 것들이 즐비했다.

  구미 유학에서 갓 돌아온 기독교 인사며 개화지식인들은 당시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을 중심으로 종로에 모여 ‘이것이 양식이다’라고 본때를 보여 주자는 무에서 YMCA 그릴에서 요리를 즐겼다. 윤영선은 1922 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농학석사를 받고 돌아온 신예로 약현(藥峴)에서 미국 선교사 그룹과 양식을 종종 나눴는데, 버터와 우유, 그리고 고기를 자급자족하려는 야심에서 개성에 송고 목장이라는 꽤나 현대식 시설을 갖춘 목장을 만들 정도였다.

  아무튼 충무로 쪽에는 일본계, 종로 쪽에는 한국계의 양식이 도사려 34 평 정도의 비좁은 YMCA 그릴에는 신지식인들로 붐벼 접심 때는 서서 양식을 먹 는 입석 양식의 진풍경도 예사로 일어났다.

  YMCA 그릴이 번창하자 김동성이 ‘백합원(百合園) 그릴을 열어 연전(延專)과 이전(梨專) 계통 사람들을 비롯해 서양에 다녀온 사람들을 만나려면 YMCA나 백합원에 가면 된다는 말이 나오게끔 되었다 .

  이상에서 살펴 본 내용이 우리 나라에 서양요리가 도입된 배경이라 볼 수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호텔건립과 철도개통이 서양요리의 발전과 동시에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손탁 호텔이 생긴 이후 현대 호텔의 등장은 외국과 의문물교환이 빈번해지면서 자연스러워졌다.

  1888 년에 건립된 인천의 대불 호텔은 호리 리기다에 의해서 인천 선린동 에 세워졌다. 그 후 청국인 이태(怡泰)에 의해 스트워드(Stewead) 호텔이 건립 되었다. 그 후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항구보다 육지에 호텔이 생기게 되었다.

2) 형성기 (1910~1945년 까지)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 개통을 시초로 1905 년에 경부선의 개통, 1906년에 경의선의 개통으로 부산~신의주간에 급행열차 융희(隆熙)호가 운행되면서 차내 식당이 생겨나 열차내 승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철도가 완성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로 이동함에따라 철도역 주변에 숙박시설이 펼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간자본이 참여할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해 철도회사 자체적으로 건설하고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되자 자연히 호텔업은 철도사업의 부대사업이 되었다. 우선 부산역사를 2층으로 건립하여 1층은 대합실로, 2층은 호텔 객실로 꾸며 1912년에 개관하였는데, 이 호텔이 우리 나라 철도 호텔의 효시이다. 이어서 신의주 철도 호텔, 조선경성 철도 호텔, 금강산 호텔, 장안사 호텔, 온양 온천 호텔 등이 계속 개관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1914년 3월에 조선 호텔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 호텔은 대지 6,700 평에 지하 1층, 지하 4층, 객실 69실로 개업을 하였다. 한 · 일합방후 철도가 개설되고 외국인이 급증하게 됨에 따라 조선 호텔은 조선경성 철도 호텔이라 불리워졌다. 철도 호텔의 등장과 더불어 지방 도시의 휴양지에는 온천지역을 중심으로 리조트 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1915년 8월에 금강산 호텔, 1918년에 장안사 호텔이 문을 열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한국의 관광사업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철도 호텔이 시초였으며, 철도 호텔의 식당이었던 서울역 그릴(grill)이 1925년 탄생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숱한 화제와 서양요리기술을 양성 · 향상시킨 산 증거로 보고 있다.

  1929 년 이전에 세워진 호텔을 보면 서울의 경성 호텔과 광화문 호텔, 목포의 목포 호텔 등이 있고, 1934 년에 지어진 목정 호텔에서는 양식요리가 시판 되기도 하였다. 그 후 반도 호텔의 탄생은 우라 나라 호텔산업의 전환기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호텔이 호화로운 호텔의 상정이라면, 반도 호텔은 상용 호텔의 대표적 숙박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현 롯데 호텔의 자리에 있었던 반도 호텔은 원래 1936년 일본인 노구찌에 의해 지어졌다. 그 당시에 는 국내 최대규모의 호텔로 객실 111개에 8층짜리 건물로 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 요리업계의 인맥을 살펴보면, 고종 때 일본인 요시무라 밑에서 일하던 이기풍(고기 · 닭 · 생선요리 전문가)을 1대 원조로 볼 수 있고, 2대로 이규태와 김원식을 들 수 있다. 이규태는 현 한전 남부영업소 자리에 있던 경성 호텔의 요리장이었고, 김원식은 금강산 그렬에서 일하다 6.25 때 납북 되었다. 이규태는 후에 프랑스 파리에 요리유학을 가기 위해 소련땅(하바로 스크)까지 갔다가 소원을 못 이루고 돌아 온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외교구락부 이중일은 증언했다(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1971년 3월 l일부터 11일까지 10회에 걸쳐 증언). 요리업계는 원래 1924년 1월 20일에 김찬열을 중심으로 충무로 1 가 소재 명치옥(明治屋)에서 이규태 외 5명이 애우회(愛友會)를 조직하고 김찬열의 집에 본부를 차렸다. 이것이 후에 조리사 협회의 모체가 되었고, 그 해 2월 10일 이규태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 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사방사회(司幇士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김찬열이 선출된다(소재 : 종로 4 가 백합원에 본부설치). 사방사회는 웨이터 · 요리사가 함께 모이는 모임이다. 1935년 4월 5일에 총회에서 이규태를 회장으로 재선출되었다. 사무실은 중구 명동 2가 115번지에 있었다. 그 후 사방사회는 광주 · 봉천신 · 경 · 부산 · 대전 · 대구 · 원산 · 함흥 등지에 지부가 결성되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 전까지 사방사회강 유지되었다.

  이 당시의 요리수준을 국제 호텔과 성북동 ‘곰의 집’에서 근무하던 남복성 옹의 증언에 의하면 일반집에서는 햄버거를 절구통에 찌어서 만들었고, 소스는 그레비 소스와 하이라이스 및 카레 등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양식인구가 서울인구를 50만명으로 잡고 줄잡아 5천명 (1%)으로 잡았는데, 상식 양식인구는 5백명이라고 일인들이 자료를 뽑아 놓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양식이 지금보다 더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서양요리를 소개한 요리책은 『조선 무쌍신식 요리제법』으로 1915 년에 종로에 있는 한흥서점에서 강은영이라는 사람이 출판한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 책을 보면 소스로 토마토 · 미트볼 · 돈까스와 이탈리아 수프 등이 있고, 디저트로는 케잌 · 아이스크림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1930년 9월 8일 국내 최초로 서양요리책이 경성부인회 편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션영대조 셔양료리법』(The Seoul Wome's Club Cook Book) 으로 판형은 국판, 전체쪽수는 313쪽이며, 영문과 국문의 대역판이다. 이 책의 머리말은 1930년 4월 15일자로 연희전문학교의 백남석이 썼으며, 목차는 24개 항목으로 22 종의 요리분류와 오븐을 사용하는 방법, 용어해설 등의 내용 이 실려 있다. 양목표는 대개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서울역(현재는 부천역 근처의 철도박물관에 서울역 그릴 식당을 재현해 놓았다)은 1925년 당시 서울인구가 약 10 만명이었는데, 5배인 50만명 정도로 늘 것을 예상하고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부산을 거쳐 함경도 · 만주로 가는 실업가 · 여행객들이 많이 왕래 하던 곳이다. 당시 메뉴는 낮에는 수프와 생선, 빵 그리고 쇠고기, 닭이 준비 되었고, 디저트는 아이스크림과 과일 · 푸딩이 제공되었으며, 밤에는 추가로 각태일과 오드볼이 제공되고 샐러드 · 커피 등이 나왔다.

  양식은 프랑스식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되었으니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양식값은 당시 쌀 한 말에 70전, A 정식은 3원 20전 정도이니 양식 한 끼에 쌀 다섯 말 값이었다. 설렁탕이 15 전, 카레라이스가 30전 1일식 정식이 l원 정도였다. 이 당시 손님은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1920~1930년대에 양식당에 다니는 한국인은 여운형 · 김규식 · 서재필 · 윤피영 · 윤덕영 · 이영민(홈런왕) 및 김을한(언론인) 등 대부분 미국으로 유학갔다 온 신지식인들이 였다. 1938년 11월 2일‘저녁에 2 원, 낮에 1원 50전의 가격의 메뉴를 살펴 보아도 저녁에 8가지 코스 요리가 제공되었다.

 

3) 정체기 (1945~1959년 까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국의 호텔업은 본격적으로 발전의 계기를 맞이했으나 해방 직후의 사회혼란과 남북의 분단, 6 · 25동란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1961년까지 호텔업의 발전은 정체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말에 총독부와 개인이 운영했던 철도열차 식당, 역구내 식당과 조선호텔, 반도호텔, 부산 철도 호텔들은 해방후 미군정에 의해서 관리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의해 교통부로 이관되었다.

  해방후 서울에서 양식만 취급하는 그릴은 미장과 수도 그릴 정도였다. 미장 그릴은 1945 년 11월에 개업한 양식집이다. 그 중에도 미장은 당시 한민당 인사들의 본거지였을 뿐더러 미군정하의 정치집회소 같은 인상을 줄 만큼 치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이 당시 조병옥 박사는 주방에 메뉴를 직접 써서 요구를 했을 정도로 양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해방 전에는 프랑스식이 유행했었는데, 미장 그렬에서 조병옥 박사(당시 경무부장)가 미국식으로 짧은 시간에 식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주문 때문에 서울시내의 식사가 모두 미국풍으로 되었다. 그래서 한 접시에 닭 · 생선 · 채소 등을 같이 제공하는 것이 이 당시 유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Gold Meat와 더운 채소로 Baked Beans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식자재는 대개 일본을 통해 수입해 왔다. 그러다가 6 · 25 가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수복 후에 현재 중앙우체국 자리에 다시 식당을 신축했고, 옛날에 근무하던 많은 사람이 모여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주방에는 10명 정도의 요리사가 근무했다. 요리는 고객이 오면 오드볼(지금의 까나페)을 주고 3가지 정도의 칵테일(새우 · 복 등)과 3가지 정도의 수프(크림 · 야채 · 콘소메), 주요리로는 한국인이 개발한 방자 스테이크(한국 최초 스테이크로 베이컨 말은 안심요리)가 제공되었고, 소스로는 도비 소스, 디저트로 푸딩을 많이 제공했다.

  그 후 1950 년 6 · 25가 나서 서울에 있는 식당들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 중에서도 미장 그릴은 대전에서 잠시 영업을 하다 서울로 와서 현 중앙우체국 자리에 식당을 개업해 많은 수익을 올려 여러 개의 식당을 체인비슷하게 개업하여 영업을 확장했다. 서울시청의 구내 식당도 그 무렵에 개업하였다(1951년 3월경). 그 후 이중일은 외교구락부를 인수하여 윤성모와 같이 일하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는 53 년간 웨이터 서비스맨으로 일상 을 보냈는데, 1928 년 16 세에 열차식당에 들어가 25년간 근무했고, 해방후 식당사장과 지배인으로 장안의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돋구워 주던 한국 최고의 서비스맨이고 양식사의 산 증인으로 모든 이는 인정한다.

  우리 나라 조리업계를 살펴 보면 외교구락부 주방의 총책임자인 윤성표옹은 1905 년생으로 그 당시 우리 나라 요리업계에서 유명하였다. 이 분은 일어 · 영어가 능통하여 다른 웨이터보다 훨씬 많은 외국고객을 접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매일 같이 다른 메뉴로 고객을 만족시켰으며, 외교구락부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요리가 수프 · 육류 · 생선 · 생러드 · 전채 · 디저트 등이 몇 백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이 당시의 주방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신성불가 침 구역이고, 유니폼은 청결과 봉사의 상징으로 흰색에 모자까지 썼다. 그리고 주방에서 손 닦는 것을 중요시했으며, 요리사는 외과의사가 수술하러 들어갈 때와 같이 깨끗이 소독한 손으로 요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청결을 강조했다. 또 이 분은 철두철미한 성격탓에 잘못된 요리는 즉시 쓰레기통에 버 리고, 한군데서 오랫동안 열심히 근무하는 자세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였으며, 외교구락부에서 1958 년부터 1976년 11월 7일(18년 근무)까지 일생을 요리사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윤성모 옹과 오랫동안 근무하던 사람은 연규학 · 최인식 · 이광길 등이 있는데, 이광길은 외교구락부에 근무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례로 결혼했다. 그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으로서 양식을 즐기는 단골고객으로 외교구락부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양식을 전혀 즐기지 않은 것은 식성이 변해서인지 궁금하다. 또한 이광길은 도큐 호텔 Open 당시 총주방장으로 근무했다. 6 · 25 당시 부산에 미군부대 장교구락부 가 있었는데, 여기서 주방장은 일본에서 오사카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를 하면서 일본 사방사협회 총무일을 하던 윤성모 옹이 해방후 귀국하여 부산에서 주방장으로 근무할 때 한국 최초 조리이사인 박명선(현재 미국에서 식당경영) 이사가 접시닦이로 처음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훗날 이 분은 유솜에서 주방장을 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분은 근무하면서 동국대 대학원까지 마쳤는데, 상사가 찾으면 동료들은 그를 항상 변명해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서로 돕고 돕는 우애가 강했던 것 같다.

  이 분과 비슷한 어두웠던 시절에 우리 업계를 끌고 가신 분들은 많지만 몇 분만 소개하면 박병희 · 최병욱 · 하태두 · 송인식 등이 있었고, 특히 전자에 -개한 하순철 옹과 전정실 옹이 있었다. 하태두 옹은 1,000 페이지에 달하는 조리용어 · 메뉴 등을 생전에 수기로 남겼다. 출판여건이 좋아지면 책을 펴서 후배들에게 전할 생각으로 메뉴를 불어로 작성하고, 재료 · 용어 등의 불어를 한글로 번역한 정성은 대단하다.

  그리고 라칸티나를 개업한 전정실 옹은 이태리요리를 시작한 요리의 대가이다. 이 분은 라칸티나에서 근무하며 소스에 대한 글을 수기로 남겼다. 필자도 이 노트를 보고 소스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 이 당시 서울시의 서양요리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전채로는 새우 각테일과 브랜디 각태일 소스가 유행이었고, 수프로는 이태 리 정통 야채 수프 ( 육수 · 야채 · 양파 · 당근 · 토마토 · 파 · 버섯), 양파 치즈 수프, 러시안 수프, 크림 수프 등이 있었다. 특히 콘소메 수프는 안심날개와 야채를 넣고 끓였다.

  샐러드는 후렌치 토마토 드레싱(지금 후렌치 드레싱에 토마토 첨가), 사우 전아일랜드 드레싱, 탈타르 소스 등을 주로 사용했다.

  생선요리는 생선에 밀가루를 묻혀 기름에 익히는 무니엘 스타일에 버터소스와 갈색 버터 소스를 많이 이용했다. 생선뼈를 오븐에 굽고 생선육수와 갈색 루를 넣고 끓인 다음 버터를 넣어 거른 후 사용했다.

  육류에는 도비 소스를 많이 사용했고, 냉장고가 없어서 안심을 그날그날 들여다가 소제한 다음 헝겊에 싸서 얼음을 깔고 그 위에 올려 숙성시키고 피를 일부 제거한 다음 고기를 썰어서 고객에게 제공했다.

  도비 소스는 원래 그레비 소스인데, 일본사람들이 발음을 도비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 당시의 소스 만드는 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큰 통 100L 정도에 고기와 야채 토마토 페이스트를 뽑아서 넣고 끓이다가 주방에서 쓰다 남는 식재료를 모두 첨가한 후에 계속 끓이면서 그 날 쓸 만큼을 덜어서 사용했다. 불 위에는 계속 갈색 육수 소스가 끓고 있다고 보아 도 된다. 3~4일 끓이다가 야채 · 고기는 걸러서 버리고 재료를 계속 첨가하여 소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맛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는 고기국물 소스가 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닷가재가 유행이었고, 뉴버그 스타일과 아메리칸 스타일이 있었는데, 뉴버그 스타일은 아메리칸 소스에 크림소스를 섞어 사용했고, 아메리칸은 석쇠에 바닷가재를 구운 후 토마토 소스를 곁들여 제공했다(생크림이 없어서 분말우유를 사용했다).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을 많이 제공했는데, 분유 · 설탕 · 노른자 등을 끓여 앙글레즈 소스를 만들어 통에 넣은 후 넓은 통에 소금을 넣고 얼음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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